전 흥 남(순천대 강사, 문학평론가)
전 흥 남(순천대 강사, 문학평론가)

사불급설(駟不及舌)이란 말이 있다. 4마리의 빠른 말(馬)이 달리는 속도보다 말이 더 빠르다는 얘기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우리 속담도 생각나게 한다. 소통의 중요 수단으로 말과 글이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글은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조금 정제되기 마련이다. 반면 말은 한번 뱉으면 거둬들이기가 쉽지 않고 전달 속도도 빠르기 마련이다. 말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언으로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말의 이러한 속성과도 무관할 수 없다. 

선인(先人)들은 수양의 한 단계로 말은 가능하면 적게 하는 것이 좋다고 권하기도 한다. 말을 적게 하다보면 상대적으로 군더더기나 실수가 적어질 것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신중론을 권한 셈이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 걸 보면 말은 또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소통의 수단인가! 

그런데 요즈음은 인터넷이 발달하다 보니 글의 전파속도도 빠르다. 자신이 쓴 글로 인해 곤욕을 치르거나 화를 입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도 필화(筆禍)의 일종이다. 글 역시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소통의 중요 수단이다. 그런데 글 역시 오해를 낳기도 하고 이로 인해 큰 화를 당한다. 인터넷이 급속하게 발달한 정보화시대에 말과 글은 증거로도 남아 있으니 삭제하지 않으면 오래가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말과 글은 양날의 칼인 셈이다. 언어는 잘 쓰면 효과적이고 유용하지만 자칫하면 화를 입는 경우가 많은 세상이다.    

정치인들이 요즈음 말을 잘못해서 곤욕을 치루기도 하고 심지어 나름으로 힘들게 쌓은 탑(?)도 일순간에 무너지는 광경을 뉴스로 접하면서 대다수 서민들의 삶도 말과 글로 인해 수난을 겪을 수도 있으니 경계해야 할 것 같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를 발휘하며 사는 사람은 큰 실패를 면할 수도 있다.    

‘남도’ 출신의 작가 이청준(호는 未白, 1936-2008)은 변화무쌍한 주제, 소재, 인물, 기법을 선보이면서 작품 속에서 한결 같은 긴장감을 유지한 뛰어난 소설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유명 대학의 교수직도 잠시 하다가 전업 작가의 삶을 이어올 정도로 치열하게 오로지 창작에 만 몰두해 온 작가이기도 하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그의 소설은 대체로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한 편이었다. 하지만 연구자 및 비평가들은 이청준이 문학적으로 이룬 금자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빼어났고 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의 문학이 천착해온 주제 중의 하나는 언어에 대한 치열한 탐구정신이었다.  

문학이 언어예술의 한 영역인만큼 언어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한 것은 작가로서 당연한 자세라고도 할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의 말과 글이 진정성이 없거나 기만(欺瞞)의 도구로 사용될 때 (국가 및 지역)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황폐해질 수 있고 심지어 언어의 복수(?)를 경고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생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성에 주목한 소설가의 눈으로 볼 때 언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심도 있게 경고했다는 점은 작금의 사회 풍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도자 및 리더의 말과 글은 더욱 더 신중하고 가려서 말해야 구성원들의 삶이 평안하다. 선진사회를 가늠하는 지표 중의 하나는 구성원의 말의 품격 유무이다. 너무 자극적인 말이나 과장된 말, 나아가 왜곡된 말에 길들여지기보다는 정제된 말, 배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회가 선진사회이다. 말의 성찬이 아닌 진정성이 배어 있는 참된 말과 글로 소통되는 국가 및 사회 공동체를 지향해 본다. 필화(筆禍)나 설화(舌禍)가 사라지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상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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